[월드컵 특집]한국 대 스페인, 5분의 기적

2014. 5. 19. 15:20

94년 미국월드컵은 상당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정말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기적같은 본선 진출에 이어 본선에서의 경기들 또한 명승부였다. 그 첫 번째 상대는 1990년 월드컵에서 3대1로 패배를 맛보게 했던 스페인이었다.

 

경기 전, 스페인 감독의 5:0 망발에 김호 감독은 1:0으로 이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한국의 전략은 무승부였다. 1승1무1패, 이것이 16강으로 가는 전략이었다. 전(前) 대회 우승국인 독일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 만년 우승후보지만 월드컵에서는 신통찮은 스페인에 무승부, 가장 약체인 볼리비아에게 1승을 거두는 시나리오였다.

 

 

1994년 6월 18일 오전 8시 30분(한국 시각)

 

시간표

 

이 날의 경기는 회사원들의 출근 시간, 학생들의 등교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필자는 아직까지 스피커에서 나오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은 공부 안하고 축구 봅시다!’

*정확한 멘트는 기억이 안 납니다.^^;

 

50명의 반 친구들과 보는 경기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수업을 안하니 금상첨화, 거기에 드라마틱한 경기 결과는 보너스였다.

 

 

댈러스- 한낮 최고기온 35도, 습도 70퍼센트

 

한국은 스페인, 독일전이 열린 미국 댈러스의 더위와 싸워야 했다. 다행히 스페인전에서는 32도, 50%의 습도로 괜찮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고정운’ 선수는 입에 단내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당시, 한국은 20대 중후반의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체력적인 우위에 있던 한국이 더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치고 달리기

 

한국의 트레이드 마크다. 좌우측 윙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던 시기다. 단조로운 패턴은 상대방에게 수를 읽히기 쉽지만, 94년 월드컵에서는 돋보였다. 살인적인 더위 속에 치러진 경기는 치고 달려 센터링을 올리는 한국 선수들을 따라잡지 못하게 했다. 그 중심에는 ‘적토마’ 고정운이 있었다.

 

고정운

*그를 보면, 오락 ‘스트리트파이터’의 고우키가 연상되었다. 나만의 생각일까?

 

스페인전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띈 선수는 고정운이다. 최전방 왼쪽 윙을 맡고 있던 그의 체력은 가히 ‘신의 경지’였다. 저돌적으로 돌파하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믿음직스러웠다. ‘적토마’란 별명도 이 때문에 지어졌다. 빠른 스피드와 몸싸움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강인한 체력은 그의 장기였다. 더운 날씨가 한국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순간이었다.

*필자의 대학교 시절, 초등학교에서 육상부였던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학교에서 가장 빠른 육상부 선수를 축구부 감독이 스카웃 했다고 한다. 축구 실력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그는 지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국의 대표 선수가 되었다!

 

 

화려한 선수진

 

94년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은 역대 최강이라는 말이 있다. 그때 당시 출전한 황선홍과 김주성은 독일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 수준급의 선수였다. 레버쿠젠에서 잠시 있었던 황선홍은 무릎 부상으로 한국에 돌아왔지만, 독일에서의 활약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김주성 선수는 보쿰 소속이었다. 현재 '정대세'가 소속된 팀이다.

 

김주성 선수는 89-91년, 3년 연속으로 아시아 연맹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실력자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동네 오락실에서 즐겨하던 ‘세이부 축구’의 한국팀 모델이기도 했다. 장발의 모습은 테리우스를 연상시켰다. ‘테리우스 안정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90년 월드컵

 

미드필더였던 노정윤은 J리그에서 맹활약 중이었고, 홍명보 선수는 92년 한국 최우수 선수로 뽑히며 스위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약체가 아니다

 

스페인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였다. 초반 5분은 오히려 한국이 완벽히 리드하는 형국이었다. 골에 가장 근접한 슈팅도 전반 15분 경,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황선홍의 센터링이 수비수를 맞고 튕겨져 나오자, 이영진이 달려들며 크로스바를 살짝 빗겨 가는 슛을 날렸다. 무승부가 아닌,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순간이었다.

 

 

10대 11

 

전반 25분 경, 절호의 찬스가 온다. 스위퍼 홍명보의 순간적인 롱패스는 최전방에 있던 고정운에게 정확히 연결된다. 급해진 스페인 선수, ‘미구엘 엔젤 나달’은 고정운 선수를 밀어버리는 반칙을 범한다. 결과는 퇴장!

 

승리는 희망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퇴장

 

 

홍명보

 

퇴장에 이은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에서의 프리킥!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지만, 예리한 한 방이었다. 퇴장을 이끌어내는 패스를 한 홍명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프리킥을 찬 것도 홍명보! 역할은 스위퍼지만, 공격 가담도 가능한 그의 활용도는 상당히 높았다. 스위퍼는 다른 수비수들을 백업하고, 지휘하고, 경기의 완급조절도 가능하게 한다. 솔직히 소화하기 쉬운 위치가 아니다. 홍명보의 탁월한 시야와 패싱력이 없었다면!

 

홍명보 프리킥

 

*이탈리아의 데로시가 비슷한 포지션을 소화할 때가 있다고 하는데, 자꾸만 미드필더 피를로가 떠오르네요!

 

5분의 2골(스페인)

 

스페인 첫골 두번째 골

 

 

10명이 싸우는 스페인에게 골을 내주는 장면은 너무 아쉬웠다. 후반 5분, 한국은 무리한 드리블을 하다 스페인 선수에게 인터셉트를 당하고, 스페인의 ‘훌리오 살리나스’는 쓰러지며 한 골을 넣는다. 스코어는 1:0.

 

이때부터 한국은 약간 힘이 빠진 듯 주춤한다. 그리고 후반 10분,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에서 두 번의 슛을 막아내지만, 장난스런 센터링에 이은 ‘고이코에체아’의 헤딩슛. 2:0이었다.

 

 

김호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

 

김주성 대신 서정원, 노정윤 대신 하석주를 교체투입한 효과는 골로 직결되었다. 무더운 날씨로 체력이 저하된 선수들을 상대로, 스피드가 좋은 두 명을 넣은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서정원은 상당히 빠른 선수로 유명했는데, 100m를 11초6에 뛸 수 있었다고 한다.

 

 

5분의 2골(한국)

 

첫 번째 골은 하석주 선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앞에서 반칙을 얻어내며 만들어졌다. 프리킥은 역시, 홍명보 선수였다. 수비수의 다리를 맞으며 굴절된 슛은 골키퍼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골대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한 골을 만회했을 뿐, 스코어는 2:1로 패색이 짙었다. 홍명보 선수는 전혀 세레모니를 하지 않는 무표정한 모습이었던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시각은 후반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홍명보 골 무표정

 

수비수를 무너뜨리는 패스와 정확한 슈팅

두 번째 골은 날카로운 패스를 통해 기회를 만들어냈다. 한국 축구에서 보기 힘든 클래스였다. 황선홍-홍명보-서정원으로 이어지는 절묘한 패스는 스페인의 조직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황선홍과 홍명보의 2대1패스, 공간을 파고드는 서정원 선수에게 정확한 연결, 각을 없애며 나오는 골키퍼를 피하기 위해 크로스바의 오른쪽 가장자리로 인사이드킥 작렬! 시각은 후반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러모니

 

누가 봐도 완벽한 골이었다. 사실 황선홍과 홍명보는 ‘포항 아톰즈(현재의 스틸러스)’에서 호흡을 맞추던 상태로 완벽한 콤비네이션이 빛났다. 각(角)이 부족한 상태였는데도, 침착한 슈팅으로 연결한 서정원 선수도 훌륭했다.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흐른다.

*그때 당시, 교실에서 같이 보던 친구들과 고함을 지르며 미친듯이 좋아했었다. 필자 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열광했다!

 

 

희생양, 황선홍

 

94년 월드컵은 16강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국민들의 아쉬움도 어느때보다 컸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 불똥은 오로지 황선홍에게만 튀었다.

 

스페인전 전반 35분, 황선홍은 골키퍼와의 1대1 찬스를 아쉽게 날려버렸다. 볼리비아전에서 있었던 2번의 결정적인(?) 찬스는 허공을 가르는 슈팅으로 놓쳐버린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에게 가해진 국민들의 원망은 도를 지나쳤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길거리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실수한 장면만 봤을 때는 화나는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스트라이커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골을 주워 먹는 선수가 아니었다. 스페인전에서, 전반전의 예리한 센터링은 이영진 선수의 멋진 슈팅으로 이어졌다. 서정원 선수의 슛은 황선홍의 발끝에서 나왔다. 아쉽지만, 사람들은 결과만 보기 때문에 이런 장면들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공격진영에서의 위치 선정만 좋은 게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에게 골을 만들어 주는 능력은 스트라이커 이상의 실력을 겸비한 선수란 것을 보여주었다.

 

*한 TV 토크쇼에서 스피드스케이팅의 이상화 선수가 한 말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를 힘들게 한 건 경기력 저하로 인한 슬럼프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주위의 지나친 기대, 그것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고 한다. 2010년 올림픽 금메달 이후, 나가는 대회마다 당연히 금메달을 딸 것이라 생각하는 주변의 시선은 선수를 짓누르는 장애물이었음에 분명하다. 

 

94년 월드컵 당시, 황선홍에게 거는 기대는 이상화 선수 이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수 본인이 느끼는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무리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실수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나부터!

 

링크:스페인전 하이라이트(출처:유투브)

 

 

 

p.s)

다음 글은 아쉽게도 볼리비아전이 아니다. 0:0이라는 스코어는 영원히 잊혀진 경기로 만들었다. 자료를 찾기도 쉽지 않아 기억만으로는 글을 쓰기 역부족이라 판단했다.

 

독일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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